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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복음/말씀
가톨릭평화신문 2016.11.23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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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 시작하며
영성 생활의 역사 살피면 영적 여정의 길 보인다
영성 생활의 역사 살피면 영적 여정의 길 보인다

▲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 천지창조 중 일부. 【CNS 자료사진】




우리에게 역사(歷史)란 무엇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역사 자체에 대한 물음보다도 우리나라 주변을 바라보면서 역사의 왜곡(歪曲)을, 그리고 우리나라 안을 바라보면서 역사의 망각(忘却)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우리나라와 관련된 역사를 쉽게 바꿔 주장합니다. 고대 우리나라 영토 범위와 관련해서 왜곡하는 주변국이 있는가 하면, 최근 우리나라에 피해를 끼친 행위를 서슴없이 미화(美化)하는 주변국도 있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역사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울분을 토하며 역사를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자고 부르짖곤 하였습니다.

한편 나라 안에서는 최근 몇십 년 동안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사건과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그 날을 기억하고 다시는 유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사한 사건과 사고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역사를 왜곡했을 때에는 그렇게 흥분하더니, 정작 본인이 역사를 망각했을 때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어쩌면 아예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우리는 역사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빨리빨리 발전시켜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인지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갈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미래에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연구할 사료를 제대로 구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립니다. 물론 필자도 우리나라 역사를 상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역사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역사의 왜곡이나 망각 없이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순간적으로 울분만 토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역사를 통해 가톨릭 영성 생활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지식을 쌓으며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정말 새롭고 유일한 경험이라고 생각해 절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영적 체험을 했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영성 생활을 실천했다고 느끼게 되면, 자신의 체험을 절대화시켜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인생이 짧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10).

시편 저자가 지적하였듯이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해 자신만의 경험이 새롭고 유일한 경험이라고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내 생애에서 경험한 것이 아직 타인의 생애에서 경험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타인의 생애에서 경험된 것이 아직 나의 생애에서 경험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몇백 년의 주기로 살펴본다면, 서로 공통되는 경험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코헬 1,9-10).

마찬가지로 코헬렛의 저자가 언급하였듯이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틀어 살펴본다면, 나의 경험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 역사에서 경험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역사는 분명히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가져다줍니다. 나와 직접 관계가 없을 것 같은 과거 타인의 경험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수 있고, 과거 타인의 작은 실수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겸손하게 과거의 영적 체험에서 오늘을 사는 영성 생활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영성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까요?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는 역사를 객관적인 측면에서 사실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고고학적인 사료들을 찾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20세기 전반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는 역사를 주관적인 측면에서 기록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역사는 승리자의 입장에서 기록됐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견해가 이에 해당합니다.

한편 20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는 역사를 사실과 기록 사이에서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한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면서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의 중간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가톨릭 영성 역사를 볼 때 객관적인 관점으로 다가가기에 분명히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2000년 그리스도교 역사가 모두 상세하게 기록돼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초자연적인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된 역사는 이미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초자연적인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과 관련된 역사는 주관적이다 못해 추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인 관점으로 영성 역사에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객관적인 관점을 전부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인이 살아온 영성 생활의 역사를 다양한 측면으로 다가가 보려고 합니다. 즉, 역사적이고 사상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그 안에서 살았던 주요 영성가의 삶과 영성신학자의 사상을 살펴볼 것입니다. 또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전례 생활과 성사 생활뿐 아니라, 수도자의 수도 생활도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이를 통해 대중들의 신심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발전되었는지 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성직자와 수도자에게 특화된 영적 여정은 어떤 것이었는지도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음악 및 미술 등과 관련된 전 인류의 정신문화와 예술도 함께 살펴봄으로써 역사적인 사실과 기록 사이에서 균형 잡힌 관점을 유지하며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필자와 함께 가톨릭 영성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자신의 영적 여정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영준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1991년 사제 수품(서울대교구)
△2007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 영성신학 박사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