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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복음/말씀
가톨릭평화신문 2017.08.16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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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8) 10세기 ① - 암흑 시기 도래와 봉건 제도 출현
이민족 침략과 봉건 제도, 교회를 흔들다


서방 교회 수호자였던 프랑크 왕국은 경건왕 루도비쿠스(Ludovicus Pius, 재위 814~840) 이후에 분할 통치되면서 왕권이 약해졌습니다. 게다가 또 다른 이방 민족들이 유럽을 침공하자, 왕권이 약해진 왕국들은 이방 세력들과 맞서기 위한 새로운 통치 제도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불행하게도 교황권은 세속 권력에 의해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심지어 이미 수도원을 장악했던 세속 권력은 새로운 통치 제도 속에서 수도원이 담당할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세속적으로 혼돈스러웠고, 영성적으로 암울했던 이 시기를 현대 역사학자들은 암흑 시기(Saeculum obscurum)라고 불렀습니다.

▲ 루도비쿠스 사후 프랑크 왕국은 셋으로 갈라진다. 이후 중 프랑크 왕국은 후대로 내려와 분할되고 편입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베르뎅 조약과 메르센 조약 후 왕국의 국경선.



프랑크 왕국의 해체와 귀족 권력의 강화

왕국 전체를 통치하던 경건왕 루도비쿠스는 왕국을 아들들에게 균등하게 물려주는 프랑크족 전통을 따르지 않고, 장자에게 물려주려 했습니다. 루도비쿠스는 817년 둘째 아들 페펭 1세(Ppin I, 재위 817~838)를 서쪽 아키텐(Aquitaine)의 분국왕으로, 셋째 아들 루트비히 2세(Ludwig II, 재위 817~876)를 동쪽 바이에른(Bayern)의 분국왕으로 임명했고, 첫째 아들 로타르 1세(Lothar I, 재위 818~855)를 공동 황제 및 후계자로 선포하며 이탈리아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이후에 넷째 아들이 태어나자 루도비쿠스는 829년 다른 아들들의 영토를 조금씩 분할해 넷째 아들에게 나눠줬습니다.

838년 둘째 아들이 죽자, 경건왕 루도비쿠스는 넷째 아들 샤를 2세(Charles II, 재위 838~877)를 아키텐 분국왕으로 임명했으나, 아키텐 귀족들은 페펭 1세의 아들 페펭 2세(Ppin II, 823~864)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864년까지 숙부와 조카 사이에 긴 분쟁이 있었습니다. 840년 루도비쿠스가 사망하자 로타르 1세가 프랑크 왕국의 황제로 즉위했으나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가 반란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843년 베르뎅(Verdun)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즉, 중 프랑크는 로타르 1세가, 서 프랑크는 샤를 2세가, 동 프랑크는 루트비히 2세가 통치함으로써 하나였던 프랑크 왕국은 셋으로 나뉘었습니다.

중 프랑크 로타르 1세는 844년 첫째 아들 루도비코 2세(Ludovico II, 재위 844~875)를 이탈리아 왕으로 임명했으며, 855년 둘째 아들 로타르 2세(Lothar II, 재위 855~869)와 셋째 아들 프로방스의 샤를(Charles de Provence, 재위 855~864)에게 왕국의 북부와 중부를 분할해 주고 은퇴했습니다. 864년 프로방스의 샤를이 죽자 형들이 그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런데 869년에 로타르 2세마저 죽자, 870년에 동, 서 프랑크 왕들은 메르센(Meerssen) 조약을 맺고 로타링기아(Lotharingia)를 분할하여 동, 서 프랑크 왕국에 편입시켰습니다.

911년에 동 프랑크 카롤링거 왕조 마지막 왕인 루트비히 4세(Ludwig IV, 재위 899~911)가 후사 없이 죽자, 귀족들은 선거로 왕을 뽑기 시작하면서 중세 독일 왕국이 출현했습니다. 서 프랑크 왕국 귀족들도 카롤링거 왕조를 대신할 인물로 위그 카페(Hugues Capet, 재위 987~996)를 선출해 987년에 카페 왕조가 들어서면서 중세 프랑스 왕국이 출현했습니다. 귀족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유럽은 국왕, 제후, 하급 영주, 기사가 쌍무적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봉건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동해안 남부에 위치한 시라쿠사가 사라센인들에게 함락되는 모습. 루도비코 2세는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와 동맹을 맺고 사라센인들을 굴복시킨다.



외세 침입에 맞서는 새로운 정치 제도

9~10세기 아라비아 출신 이슬람교인을 일컫는 사라센인(Saracen)이 여러 차례 유럽을 침공했습니다. 840년쯤 사라센인은 이탈리아 내에 살던 이슬람교인과 연합해 침략하면서, 846년 로마까지 약탈했습니다. 847년 로타르 1세가, 그리고 848년 루도비코 2세가 사라센인을 물리쳤지만, 이후에도 끊임없이 침공했습니다. 866년 사라센인이 왕국의 남쪽을 약탈하자 루도비코 2세는 869년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 1세(Basilius I, 재위 867~886)와 동맹을 맺고 871년 사라센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서 프랑크는 바이킹(Viking)으로도 불리던 노르드인(Norsemen)의 침략을 당했습니다. 9세기 말엽에 서 프랑크를 습격했던 노르드인은 900년쯤 센(Seine)강 북쪽 지역까지 침입했습니다. 결국 911년 샤를 3세(Charles III, 재위 898~922)는 노르드인과 협약을 맺고 북쪽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훗날 이 정착지를 노르망디라 불렀습니다. 북유럽에 정착한 노르드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오늘날 헝가리인(Hungarians)으로 불리는 마자르족(Magyars)은 동 프랑크에 자주 침입했습니다. 헝가리 아르파드(rpd, 845~907) 대공은 895년 동 프랑크 왕국이 다스리던 카르파티아(Carpathian) 평원에 정착해서 이듬해인 896년 헝가리 왕국을 설립했습니다. 특히 헝가리는 동 프랑크 루트비히 4세 재위 시기에 자주 침입했으며, 933년에도 침공했으나 하인리히 1세(Heinrich I, 재위 918~936)가 헝가리의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955년 헝가리 퍼이스(Fajsz, 재위 950경~955경) 대공이 독일 왕국 오토 1세(Otto I, 936~973) 대제와의 전쟁에서 대패하자, 결국 헝가리 게저(Geza, 재위 972~997) 대공은 국가 노선을 평화적으로 바꾸고 가톨릭 왕국으로 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 교황권의 약화로 수도원들은 봉건 제도에 휘둘리게 됐다. 세속 권력에 휘둘리던 수도원들은 결국 개혁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봉건 제도에 휘둘리는 수도원과 교황권의 약화


9세기에 프랑크 왕국이 여럿으로 나뉘면서 왕권이 약해진 가운데 10세기까지 외세의 침입이 이어지자, 국왕들은 제후들과, 제후들은 영주들과, 영주들은 기사들과 상호 의무를 지는 계약을 맺고 힘을 합해 외세 침략에 맞서면서 봉건 제도는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교황 세르기우스 3세(Sergius PP. III, 재임 904~911)부터 교황 요한 12세(Ioannes PP. XII, 재임 955~964)까지 약 60년간 12명의 교황이 로마 투스쿨룸(Tusculum) 가문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테오필락투스 1세(Theophylactus I, 864이전~924/25) 백작은 교회의 내분을 틈타서 세르기우스 3세를 교황이 되도록 도움으로써 향후 100여 년간 이 가문이 교황들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 가문은 자손을 교황에 선출되게 함으로써 모친을 비롯하여 친족 여성들의 섭정이 발생했습니다.

수도원의 사정도 비슷했습니다. 봉건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정치권에서 통치 세력과 기사들을 연결하는 유능한 행정가가 필요했습니다. 수도자들은 학식도 있고 행정력도 갖추었기 때문에, 세속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세력 아래에 있는 수도원과 수도자들을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결국 끊임없이 세속 권력자에게 휘둘리던 수도원은 본연의 수도 생활로 돌아가고픈 열망을 표출하면서 개혁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10세기 초 기회가 주어지자 수도원 개혁 운동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