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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복음/말씀
가톨릭평화신문 2017.12.13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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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54) 13세기 ② - 도미니코와 설교자들의 수도회
설교로 영혼 구원 힘쓰고 묵주기도 전통 전해
▲ 성모 마리아에게 묵주를 받는 성 도미니코를 그린 유리화. 출처=가톨릭굿뉴스

▲ 교황 호노리우스 3세에게 설교자들의 수도회라는 명칭으로 도미니코회 설립을 공식 승인받는 성 도미니코.



중세 중기에 다양한 수도회가 속출하자 지역 주교들은 자신들의 사목 활동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했는지 새로운 수도회의 출현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주교들의 이런 불평 때문에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새로운 수도회 설립을 더 이상 승인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이미 새로운 수도회가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가톨릭 교회는 탁발 수도회(Mendicant Orders)라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를 승인했습니다.



이단 척결과 이단자 개종에 전념한 도미니코

스페인 카스티야(Castilla) 지방 부르고스(Burgos) 인근 칼레루에가(Caleruega) 출신 도미니코(Domingo de Guzmn, 1170~1221)는 어린 시절부터 성직자였던 외삼촌에게 위탁되어 라틴어를 비롯하여 성직을 준비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도미니코는 이후 1212년 스페인에서 최초로 대학이 설립될 도시인 팔레시아(Palecia)에서 약 10년간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1196년쯤 사제품을 받고 오스마(Osma)교구 의전 사제단에 참여했습니다. 도미니코는 1199년에 의전 사제단을 의전 수도회로 되살리고, 1201년에 의전 수도회 부원장에 선출되면서 청빈 생활과 관상 생활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도미니코는 1203년과 1205년 오스마의 주교 디에고(Diego de Acebo, 재임 1201~1207)가 왕실 대사 자격으로 북유럽을 여행하는 데에 동행하면서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관상 생활에서 벗어나 여행을 하던 도미니코는 랑그독(Languedoc)에 이단 때문에 발생하는 위험을 목격하고, 그 당시 교회의 현실을 느끼며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도미니코는 1206년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알비파, 발덴서파, 카타리파에 대항하는 시토회 출신 교황 사절들을 만난 후, 교황이 맡긴 임무인 이단 척결에 투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206년 말 도미니코는 알비파에서 다시 가톨릭교회로 돌아온 여성들을 받아들일 목적으로 프루이유(Prouille)에 여자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이 수도원을 기반으로 설교에 전념했습니다. 1214년 도미니코는 동료 설교가들과 함께 공동체 설립 계획을 세우고, 1215년에 툴루즈(Toulouse)로 이주해 교황 사절의 동의와 지역 주교 풀크(Foulques de Toulouse, 재임 1206~1231)의 승인을 얻어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특히 풀크는 도미니코와 동료들에게 교구 전역을 순회하며 교구민들이 신앙과 윤리를 지킬 수 있도록 설교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의전 수도회를 기반으로 설립된 탁발 수도회

도미니코와 풀크는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열린 로마를 방문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PP. III, 재임 1198~1216)에게 설교를 목적으로 하는 새 수도회 설립 승인을 요청했으며, 교황에게 구두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1216년 말~1217년 초 도미니코는 다시 로마를 방문해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PP. III, 재임 1216~1227)에게 설교자들의 수도회(Ordo Fratrum Praedicatorum)라는 명칭으로 도미니코회 설립을 공식으로 승인받았습니다. 다만 새로운 수도회를 더 이상 승인하지 않겠다는 라테라노 공의회의 결정 때문에, 도미니코회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 규칙을 따라야 했으며, 당분간 프레몽트레회 지도를 받아야 했습니다.

의전 수도회의 영향을 받은 도미니코회는 수도 생활과 사목 활동을 적절하게 조화시킨 영성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먼저 도미니코회는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에 대한 수도 서약을 하고 관상 생활을 지향했습니다. 다만 베네딕토회나 시토회와 같은 기존의 수도회가 함께 모여 장엄하게 성무일도를 바치면서 관상 기도를 실천했다면, 도미니코회는 노래를 부르듯이 가락에 맞추어 짧고 간략하게 성무일도를 바치면서 그 시간마저 주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활용했습니다. 때로는 혼자 성무일도를 바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도미니코회가 관상 생활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도미니코회는 참회의 금욕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특히 도미니코는 수도회 형제들이 문전걸식할 수 있는 탁발 제도를 허용했습니다.

한편 도미니코회는 교회와 교황과 신앙의 진리에 충실한 하느님 중심적이며, 그리스도론적이고 사제적인 영성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즉, 세상 만물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하느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로써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며, 미사성제, 특히 성체성사에 초점을 맞추는 영성 생활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훗날 도미니코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도미니코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심 운동에서 자연스럽게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유추해 실천했습니다. 특히 도미니코회는 묵주기도 전통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복음 선포 위해 신학 연구에 몰두한 도미니코회

하지만 무엇보다도 도미니코회는 사도적인 영성을 살았습니다. 도미니코회는 복음서에 나오는 가난한 그리스도, 설교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완덕으로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도미니코회는 회헌에서 수도회 설립 목적이 설교를 통해 인간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영혼에 유익함을 제공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해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복음 선포야말로 도미니코회가 포기할 수 없는 영적인 사명이었습니다.

따라서 도미니코회는 수도자들이 공부를 가장 중요한 의무로 여기고, 늘 새로운 것을 연구하여 하느님 말씀을 진실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거룩한 진리를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연구하는 것이 수도회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미니코는 수도회 형제들이 신구약 성경을 꾸준히 연구하기를 늘 강조했습니다.

도미니코회는 일찍이 대(大)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200~1280)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1274)와 같은 걸출한 신학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쾰른(Kln)에서 신학을 공부한 알베르투스는 독일 각지에서 강의하며 명성을 알렸고, 파리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도미니코회가 쾰른에 설립한 수도회 대학에서 초대 학장을 역임했습니다. 알베르투스는 철학과 신학뿐 아니라,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어 보편 박사라 불렸습니다. 알베르투스의 제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체계로 하느님 존재를 증명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저술하며 독보적인 신학 사상을 확립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와 로마를 오가며 교수 생활과 저술 작업을 왕성하게 했으며, 보편 박사 혹은 천사 박사라고 불렸습니다.



카스티야 지역에서 11세기 중반에 이미 아랍계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회복하며 활기를 띠던 분위기에서 성장한 도미니코는 프랑스 내에 이단을 척결할 강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게다가 의전 사제단과 의전 수도회를 차례로 경험했던 도미니코는 엄격한 청빈 생활과 관상 생활 속에서도 복음 선포의 사목 활동에도 강한 의욕을 불태웠습니다. 다만 인간 이성 활동을 강조했던 도미니코회는 인간 의지와 사랑에 기반을 두었던 전통적인 신비체험을 등한시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