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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가톨릭평화신문 2018.03.14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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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소장의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 (15) 그리스도인은 미투(#Me Too)운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죄인에 대한 폭로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치유가 없다면 피해자에게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올 위험이 있다. 그래픽=문채현



미투는 정치 공작인가?

여성들의 "나도 당했다"라는 고통스러운 외침

자체는 공작이 아니다. 그러나 미투는 특정 목적을 가진 집단들이 악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투로 비난받는 문화계 유명인들의 다수가 과거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며 또 여당의 유력 정치인들만 조준 사격하듯 지목된다. 그렇다고 해서 정권을 잃은 세력이 미투를 기획했다고 단순하게 볼 수는 없다. 폭발력과 전염력이 가장 강한 감정인 분노를 최고의 흥행 소재인 성(性)과 함께 이용하는 미투를 큰 그림에서 이해해야 한다.

수많은 미투가 폭로의 방식으로 특종 보도되면서, 당초 미투와 맞물려 있었던 시대적 사명인 검찰 개혁이라는 이슈는 증발해버렸다. 거의 모든 언론이 미투 사례를 발굴해서 쏟아내기 때문에 온 국민의 관심이 자극적인 보도에만 쏠리고 있다. 미투 과다는 정치권에서 중요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절묘하게 나오는 연예인 ○○동영상과 거의 같은 현상인데, 이번에는 국민 대다수가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가해자로 지목된 유명인을 비난하기에만 열을 올린다. 미투는 남북 분단 이후 모든 뉴스를 평정했던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묻어버릴 정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정교하게 이용당하는 미투와 국민들

이 분노의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며 확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투에 보이지 않게 기름을 붓고 부채질을 하면서 막대한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하며 개혁이 망각되게끔 선전활동을 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미투가 모든 매체를 점령해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다른 중대 이슈들을 삼켜버렸기 때문에 이들은 국민의 이목과 개혁의 칼날을 피할 좋은 기회를 잡았다. 냄비근성과 쏠림 현상이 심한 국민들이 분노에 이끌려 분열되기 때문이다. 1987년 두 열사의 죽음으로 직선제 민주화를 얻어놓고도, 분열로 인해 곧바로 6개월 후에 권력을 그 독재 세력에게 다시 헌납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 상황은 전혀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다.

분단 이후 60여 년간 이들은 남북의 이념 분열과 동서의 지역 분열을 악용해 한반도 남쪽을 착취했다. 그들에게 동력을 주었던 두 분열의 구도가 무뎌지는 시점에 상하 관계에 있는 남녀의 분열이 분노와 함께 거대하게 터져 나와 악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미투는 교묘하게 이용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투를 외치는 여성들과 거기에 분노하는 대중들은 자신이 이용당하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미투의 외침이 "정당하다" "옳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래서 미투 과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고단수 공작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악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분열을 통해서 이익을 취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악의 전형적인 속성이다. 악은 철저하게 시대에 따라 분열의 주제를 기민하게 달리 설정, 사람들이 서로 물어뜯어 시대적 요청을 망각하게 하는 데 능하다. 그리스도인은 미투를 악용하는 옐로우 저널리즘을 거부하고, 그 배후의 영적인 악을 식별해야 한다. 여성들의 고통과 억울함을 외면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극적인 폭로로 시청률을 좇는 기업의 영업 방식이 아닌 철저하게 예수님의 방식을 따라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거악에 이용당하는 방식으로는 사회 통합도 또 당사자 남녀의 용서와 화해도 불가능하고 분열만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의 방식이 무엇일까?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예수님이 치유하시는 장면(요한 8,1-11)을 영(靈)으로 읽을 수 있어야 그 방식을 식별해낼 수 있다. 여자는 함정에 빠져서 억울하게 잡혀 왔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예수님께 그 여자를 단죄하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하신다. 나이 든 사람부터 모든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난다. 이는 인간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도 예외 없이 이 음란의 죄를 짓고 또 그 피해를 당하며 살아감을 뜻한다. 90의 여성이 성추행 경험이 있다는 여배우의 말도 이 맥락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된다. 예수님은 그 내면에 악을 품고 있는 바리사이, 율법학자, 군중을 다 떠나게 하신 후, 일대일 관계에서 내밀한 방식으로 여성을 회복시킨다.



미투와는 다른 예수님의 방식

이 여인에게도 억울함과 분노가 분명 있지만 예수님은 여인에게 군중들 앞에서 그 부정적 감정을 표출하라고 하지 않고, 군중들과 격리시켰다. 왜 그랬을까? 군중들이 돌을 던져서 여인을 죽일 것이기 때문인데, 현대식으로 보면 2차 가해를 원천 봉쇄하신 것이다. 함정에 빠져서 잡혔기 때문에 상대방 남성을 향한 원망과 복수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대중 앞에서 남성을 탓하며 표출한다면, 그 행위가 성과 같은 내면의 깊은 문제에서는 상처를 더 악화시키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방식을 택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손수 그 고통을 치유하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지금의 미투는 예수님과는 정반대 방식으로 갈수록 더 심하게 진행되고 있다.

억눌렸던 감정을 방송에서 터뜨리면 온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치유되는 것 같지만, 바로 이 행위 자체가 본인에게 더 큰 상처가 된다. 내면이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아픔을 대중에게 드러내는 일은 사람들 사이에서 악이 상호작용하는 길을 터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악을 끌어들이는 역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를 각오한 여검사도 그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운데, 그 이후 여성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미투에 뛰어들고 있다. 이는 상당히 위험하다. 무분별한 2차 가해가 반드시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도(道)가 높고 내면이 정화된 심리치료사는 상처 많은 내담자에게 미투를 권할 수 없고 권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권유에 의한 미투도 등장하기 시작했다는데 이 방식은 결코 사람과 공동체를 살리지 못한다. 국정농단과 같은 사회적 비리는 폭로만으로도 개혁의 물꼬가 트이지만, 내면의 깊은 영역인 성의 문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영적 치유

예수님은 사람들이 여인을 데리고 왔을 때부터 줄곧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를 쓰셨고, 여인은 계속 서 있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하실 때와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실 때만 몸을 일으키셨다. 예수님은 왜 줄곧 땅에 몸을 굽히고 있었을까? 여인은 분노, 원망, 수치심 등으로 고개를 들 수 없어서 땅만 내려다봐야 했는데, 이렇게 시선이 향한 곳이 곧 여인의 상처 입은 마음이 있는 자리인 땅바닥이다. 예수님은 여인의 마음인 이 땅에 무언가를 계속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시며 그 굳은 땅, 즉 여인의 마음과 영혼을 부드럽게 만드신 것이다.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라고 물으시자, "아무도 없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왔다. 이는 예수님이 여인을 단죄받을 죄로 끌어갔던, 여인 안에 숨어 있는 악을 제거해주셨다는 뜻이다. 이것이 진정한 치유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영적 해방이다. 예수님은 연이어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신다. 여인은 전적으로 피해자인데,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하실까? 바로 이 지점이 폭로로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느끼게 해주지만 결국에는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세상의 미투 운동과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는 치유가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깊은 차원의 영적 체험이 없으면 이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는 다음 편에 자세히 다룬다.



<사랑과 책임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