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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복음/말씀
가톨릭평화신문 2018.03.14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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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66) 15세기 ① - 콘스탄츠 공의회 신학자들의 신학과 영성
교황과 공의회의 대립… 혼란에 빠진 교회
▲ 공의회 신학자들의 활동은 그 행보에 따라 신자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콘스탄츠 공의회 모습을 담은 그림 출처=위키피디아



중세와 근세를 구분하는 분기점이었던 르네상스(Renaissance), 즉 문예부흥 운동은 14~16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을 재해석하며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문예부흥 시기에 유럽인들은 14세기 출현한 인문주의자들이 고전에 관심을 두는 것을 목격했고, 15세기 중반인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며 천년 제국을 멸망시키는 사건을 큰 충격과 함께 멀리서 바라보았으며,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이 나타나 그리스도교가 대혼란을 겪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영성 사조를 맞았습니다.



▲ 피에르 다이.



잘못된 윤리 원칙을 제시했던 피에르 다이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이 대립하던 시기에 서방 교회 분열을 매듭짓기 위해서 피사(Pisa) 공의회(1409)와 콘스탄츠(Konstanz) 공의회(1414~1418)에서 활약했던 신학자들이 나섰습니다. 이들은 공의회 우위설(優位說)을 지지함으로써 추기경들이 공의회를 통해서 대립하는 교황들을 사임하도록 만들거나 폐위시키고 교황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PP. V, 재임 1417~1431)를 선출했습니다. 공의회 신학자들은 활동 행보에 따라서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에 피해를 주거나 도움을 주었습니다.

프랑스 북부 콩피에뉴(Compigne) 출신이었던 피에르 다이(Pierre DAilly, 1351~1420)는 1363~1368년 나바르(Navarre)대학에서 철학을, 1372~1381년 소르본느(Sorbonne)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또한 피에르는 1384년 나바르대학 학장으로, 1389년에 파리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PP. XIII, 재임 1394~1423)에 의해 1395년 르퓌(Le Puy)의 주교로, 1397년 캉브레(Cambrai)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던 피에르는 1406년 파리 교회회의에서 대립교황 베네딕투스 13세에게 했던 순명을 철회했습니다. 한편 피사의 대립교황 요한 23세(Ioannes PP. XXIII, 재임 1410~1415)에 의해 1412년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1413년 교황 특사로 독일에 파견되었던 피에르는 대립교황 요한 23세를 도와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가 소집되는 것을 찬성했습니다. 결국 피에르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선출된 교황 마르티누스 5세에 의해 아비뇽에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피에르는 저서 「거짓 예언자(De Falsis Prophetis)」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던 양의 옷차림을 하였지만 속은 이리들인 거짓 예언자(마태 7,15 참조)와 같은 이단자들의 책략과 사악한 교사들을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또한 저서에서 피에르는 유럽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점성술의 폐해를 공격했습니다. 피에르의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에 이단적인 요소가 침투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에르는 잉글랜드 남동부 서리(Surrey) 주의 오컴 출신으로서 스콜라 철학자였던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1285~1347)의 철학 사상을 따르는 윤리 원칙을 세움으로써 오류를 범했습니다. 피에르의 윤리 원칙에 따르면,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른 것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선과 악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셨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인간의 행동을 허락하시면 선한 행동이 되고, 금지하시면 악한 행동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윌리엄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인간이 하느님을 미워하면서도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결국 교회는 잘못된 신학적 원칙에 기인했던 윌리엄과 피에르의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들을 단죄했습니다.


▲ 장 드 제르송.




이성과 감성의 조화 속에 실천적인 영성을 제시한 장 드 제르송


프랑스 북동부 흐텔(Retherl) 근처 제르송 레 바흐비(Gerson-ls-Barby) 출신이었던 장 드 제르송(Jean de Gerson, 1363~1429)의 본명은 장 르 샤를리에(Jean le Charlier)였는데 당시 관습에 따라서 출생지명으로 불렸습니다. 장은 1377년 나바르대학에 입학해서 피에르의 제자가 되었으며, 1381~1394년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장은 1395년 피에르의 뒤를 이어 파리대학교 총장이 되었으며, 1397~1401년 벨기에 서북부 브뤼주(Bruges)에 머물면서 라인랜드(Rheinland)와 로우랜드(Lowland)의 신비신학을 접했습니다. 이때 잠시 중병을 앓으면서 영적 체험을 했던 장은 1401년 파리로 돌아와 신비 생활에 관심을 두고 정화의 길과 완덕의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장은 피에르와 함께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해 공의회 우위성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결국 파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생의 말년을 리옹(Lyon)에서 보냈습니다.

장은 전 생애 동안에 영성생활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먼저 장은 영적 체험을 했던 초기에 「관상의 산(La Montagne de Contemplation)」과 「가난한 영성(La Mendicit Spirituelle)」 및 「영혼의 영적인 삶(De Vita Spirituali Animae)」을 저술했으며, 신비 생활에 관심을 갖던 파리 시절에 「사변적 및 실천적 신비신학(De Mystica Theologia Speculativa et Practica)」을 저술했습니다. 또한 장은 리옹 수도원에서 은수생활을 실천하던 시기에 「신비신학의 해명(De Elucidatione Mysticae Theologiae)」 및 「어린이들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방법(De Parvulis ad Christum Trahendis)」을 저술했습니다.

장의 영성신학은 사변신학과 신비신학의 조화를 꾀했습니다. 장의 견해에 따르면, 진리를 탐구하는 사변신학은 회개의 감성 없이 지성만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또한 과도한 감성과 애정만으로 선을 추구하는 신비신학은 정확한 분별력 없이 몽롱한 애정으로 거짓 신비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여겼던 장은 참된 신비체험에 참여하기 위해서 사변과 신비 사이에 실천적인 요소를 첨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성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회개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첫발을 내딛습니다. 다음으로는 가능한 방법을 모두 사용하며 성실하게 묵상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준비가 된 인간 영혼은 사랑의 작용으로 마음이 단순화되는 변형을 통해 결과적으로 관상의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특히 장은 인간 영혼이 변형을 통해 신비체험에 참여한다더라도 몽롱한 황홀경 속에서 인간의 이성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도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장이 실천신학을 강조함으로써, 근세 영성생활은 실천적인 측면이 강조된 체계를 갖추면서 새 신심 운동(Devotio Moderna)이라는 새로운 사조를 맞았습니다. 그러므로 서방 교회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공의회 우위성을 강조했던 신학자들 중에서 장은 근세 그리스도인들에게 체계적인 영성생활을 제시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긍정적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가톨릭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