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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복음/말씀
가톨릭신문 2018.03.21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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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강론을 준비하려는 마음이 자꾸 겉돌았습니다. 제 강론이 신자분들께 얼마나 도움이 될지, 강론을 읽고 들으시는 분들이 과연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분심이 일었습니다. 속상했습니다.



어릴 적, 선생님의 훈화시간이면 으레 딴청을 부리며 흘려들었던 그 시절이 떠오르면서, “또 설교하시네~~~”라는 마음으로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어른들의 훈화처럼 의미 없고 알맹이 없는 ‘그 말이 그 말’이라는 취급을 받을까 염려되었습니다. 강론이 시작되면 으레, 부스럭…… 주보를 펼쳐 읽는 신자분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형편이니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강론을 통해서 신자들을 가르치려는 사제의 욕심 탓일 수 있습니다. 강론을 통해서 삶을 훈계하고 윤리지침을 교육하려는 사제의 넘치는 열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습니다. 주님께 죄송하다는 생각만 깊었습니다. 차라리 이번 강론은 아무것도 적지 않은 빈칸으로 비워두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제 좁디좁은 한계가 와락 슬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의로운 고민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설교하거나 훈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제 마음을 후볐습니다. 그저 다가가 느끼게 해주셨던 예수님처럼 강론하지 못하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을 뵙도록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복음이 곧 예수님이시니까요. 강론은 결코 삶의 교훈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며 질타 섞인 잔소리를 해대는 것이 아니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달픈 삶에 연민하시는 분이시니까요.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병자들의 청을 들어주시며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렇게 당신을 통해서 하늘나라를 온몸으로 느끼도록 해 주시는 분이시니까요.



다만 주님께서는 오늘도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사제가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칠 때에 그 허술한 빵의 모습 안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 허약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우리 스스로 깨달아 고백하게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의 진정한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백인대장이 그날, 십자가 아래의 그 처참한 자리에서 바쳤던 고백이야말로 주님을 향한 참된 예배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배는 하느님의 심정에 깊이 공감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는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인 까닭입니다. 예배는 ‘쇼’가 아닙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예배입니다. 바로 내가 회개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께 나의 허물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통회하여 예수님을 뵙는 바로 그 마음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일은 신앙생활이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쇼’일 수 있다는 사실이라 생각됩니다. 진심으로 회개한 듯 보이는 내 모습이 ‘쇼’일 수 있고, 사랑한다는 내 마음이 가식일 수 있으며 용서했다는 말이 진심이 아닐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이 얼렁뚱땅한 우리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두렵고 무서워해야 할 일일지요? 힘들고 어려운 일은 죄다 마다하고 피하려는 속셈을 마치 겸손인 양 치장하는 내 모습은 또 얼마나 끔찍하고 교활한 일일지요? 수월하고 평탄한 신앙인으로 지내는 것에 만족하며 그것이 축복인양 착각하는 못난 신앙이 과연 어디에 소용이 있을지요?



이야말로 오직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고 예수님을 사용하려는 것에 불과할 테니 말입니다. 내게 필요한 무엇을 채워주시는 분이기에 하느님을 찾고, 예수님께 떼쓰는 아이의 수준을 벗어날 때에 제대로 된 믿음을 살게 될 테니 말입니다.

믿음은 고착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적당하다는 선도 없습니다. 믿음에 안주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매일 매 순간 업그레이드되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활동하는 하느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인은 매일 매 순간을 새로운 놀라움으로 살아갑니다. 매일 매 순간, 어제와 확연히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느끼게 되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하여 기쁘고 감사하게 복음을 살게 됩니다. 때문에 믿음인은 불행해하지 않습니다.





성지 주일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갖은 수난을 겪으시고 극도의 고통을 당하시며 죽으십니다. 부탁합니다. 어차피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라거나, 수난 받고 죽어서 우리를 살리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니, 당연한 일인 듯이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음~ 성금요일에 돌아가셔도 사흘 후에는 부활하시는데 뭐!”라는 생각을 치워 주십시오. “그러니까 예수님이지”라는 말 따위를 삼가주십시오.



예수님의 수난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극도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화해의 제물로 바치며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위한 기적은 전혀 행하지 않는 것을 보시며 하느님은 통곡하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셨을 것만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날 아들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시며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셨을 것만 같습니다. 하느님의 비명에 온 우주가 깜짝 놀라, 그 두텁고 튼튼한 예루살렘 성전휘장이 찢어졌을 것이라 싶습니다.



이 극진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이 오늘도 세상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 그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당신처럼 사랑하고 당신처럼 희생하며 당신처럼 부활할 것을 원하십니다.



오늘 성지가지를 높이 들고 환호하는 우리 모습이 ‘쇼’가 아니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에 대해서 눈을 뜨는 귀한 믿음을 살기 바랍니다. 밝아진 눈으로 주님을 뵙는 진정한 예배인이 되기 바랍니다.



성지 주일,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님을 만나 춤추고 기뻐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감동적인 삶을 살게 되는 축복이 임하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를 취득하고 부산 가톨릭대학 교수로 재임하면서 교무처장 및 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