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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복음/말씀
가톨릭평화신문 2018.05.18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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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3)
죽음 도사리는 낯선 땅에 생명 말씀 전하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일행은 1542년 5월 6일 인도 중서부 고아에 도착했다. 하비에르는 초기 동료 10명 중 처음으로 유럽을 떠나 비그리스도교 국가에 파견됐다. 그러기에 하비에르의 선교 활동은 초기 예수회 선교를 특징짓는다. 초기 동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실천하고자 했던 비그리스도인들의 복음화를 처음으로 실천하는 셈이다.
 

▲ 이방인에게 선교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하비에르는 인도 고아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포르투갈 말로 짧은 가톨릭 교리서 「Doctirna Christina」를 썼다. 그는 고아에서 두 가지 일을 마음에 품었다. 첫째는 본국에서 인도로 보낸 포르투갈인들의 신앙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하층민과 소외된 현지인들을 우선으로 선교하는 것이었다. 고아에는 성당이 있고 주교, 사제들이 있었지만, 성문을 나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고아에는 1541년 설립한 산타페 신학교가 있었다. 하비에르는 자신이 도착하던 해에 성 바오로 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이 신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대학 과정에서 문법, 수사학, 고전 강의를, 초급 과정에서는 읽기와 쓰기, 그리고 간단한 간호를 가르쳤다. 동시에 이 학교는 고아의 예수회 선교본부가 됐다. 하비에르는 병원 환자들을 위해 사목하고 해안가 마을을 돌며 아이들과 하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하비에르가 거리를 다니며 종을 흔들면 아이들과 하인들이 몰려들었다.
 

인도 남부는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오가는 향료, 진주, 보석, 면화 상인들의 수백 년 된 해상 무역로였다. 1527년 인도 남서부는 전쟁 중이었다. 바다에서는 아랍 함대가, 육지에서는 마두라 섬(현 인도네시아 자와 섬 동북부)의 군주와 코모린 곶 서쪽의 트라반코레 왕국이 해상권과 진주조개 어장을 두고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인도 최남단 코모린 곶 카니아쿠마리는 당시 세계 최대의 진주조개 어장이었지만 그 주변에 흩어져 사는 파라바족 사람들은 가난했고 힘이 없었다. 파라바족의 대표 비키라마 아디타 판드야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고, 무슬림의 후손들인 렙바이에게 진주조개 어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1532년 고아를 방문해 포르투갈에 도움을 청했다.
 

포르투갈은 보호 조건으로 부족 지도자들이 즉각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이후에는 부족민들까지 개종할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자신들이 전략 요충지를 확보하고 진주조개 어장을 관리하고자 했다. 합의가 이뤄졌고 부족민 2만여 명이 집단 세례를 받았다. 1537년에는 부족 전체가 가톨릭임을 선언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종교를 선택했다. 포르투갈은 1538년 6월 27일 베달라이에서 아랍 함대를 무찔렀고, 파라바족은 다시 풍요를 즐겼다. 가톨릭임을 선언했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믿어왔던 토속신앙으로 돌아갔다. 가톨릭 교리를 설명해줄 통역자가 없는 것도 문제였고, 개종을 포르투갈의 보호증 정도로 여기는 것도 문제였다.
 

하비에르는 파라바족 소식을 들었다. 미세르 파울로에게 성 바오로 대학을 맡겨두고 1542년 10월 프란치스코 만실라와 고아의 산타페 신학교 출신 현지 성직자 몇 명을 통역 삼아 코모린으로 이동했다. 하비에르는 바스크어를 하고 파라바족은 타밀어를 썼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중 포르투갈어와 타밀어를 모두 알아듣는 사람들을 뽑았다. 쉽지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라틴어 기도문을 타밀어로 번역했다. 성호경부터 시작해, 삼위일체 교리, 신경, 십계명, 주님의 기도, 성모송, 그리고 성모찬송가, 참회 기도 순이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이미 세례받은 이들에게는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간혹 토속신앙 상징들이 모셔진 천막을 불태우기도 했다. 1544년 말까지 하비에르는 코모린 곶 해안가 160㎞에 걸쳐 흩어져 있는 마을들에 40여 개 성당을 세우고 교리교사들을 임명했다.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의 왕비 카타리나가 보내준 돈으로 성당이 지었고 교리교사들에게 급여를 줬다. 교리교사들은 신자들 앞에서 타밀어로 번역한 사도신경, 주님의 기도 등의 기도문과 믿을 교리 요점들을 운율에 맞추어 읽었다. 사람들은 그 뜻을 알든 모르든 따라 불렀다. 1544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1만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예수회는 하비에르 이후에도 인도에 계속 예수회원을 파견했다. 예수회에 인도 선교는 중요했다. 초기 동료들의 열망이 담긴 「기본법」 초판에는 예수회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가르침을 통해 영혼이 진보하고 신앙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첫 번째 목적인 영혼의 진보는 유럽에 남은 예수회원들이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목적 신앙 선포는 이교도의 개종을 의미한다. 초기 동료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지만, 배편이 없어 실현하지 못한 염원이었다. 하비에르가 인도에 파견됐을 때 이 두 번째 염원이 실현되기 시작했다.
 

하비에르가 인도 선교 상황을 담은 편지를 로마에 보냈을 때 그것을 읽고 감화돼 예수회에 입회한 나달은 후에 이 두 목적을 두 날개로 비유했다. 한 날개는 독일에 있는 예수회원들의 신학과 영성 활동, 다른 날개는 인도 제국에서 하비에르를 장상으로 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와 사목 활동이었다. 예수회원들의 고국, 특히 이탈리아와 이베리아반도의 여러 나라가 예수회원들을 원했다. 언어와 문화에 장벽이 없는 유럽에서는 쉽게 영성의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낯선 땅 인도에는 언어 장벽, 풍토병 혹은 전쟁, 투옥,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사목과 선교라는 다른 한 날개를 무시할 수 없었다. 날기 위해서는 선교라는 반대쪽 날개가 꼭 필요했다.

▲ 김태진 신부 (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