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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복음/말씀
가톨릭평화신문 2018.06.14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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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7)
‘하느님=엄청난 거짓말’ 통역에 어려움 겪어
▲ 히라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 성당




일본 복음 전파 난항

일본인들은 하비에르가 불교의 한 종파를 가르친다고 생각했다. 하비에르가 불교의 본향인 인도에서 왔다는 사실도 그 혼동에 한몫했지만 선교할 때 통역과 번역을 전담하다시피 했던 야지로에게도 원인이 있었다. 일본에 오직 하나의 창조주만 있다고 잘못 생각한 야지로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번역할 때 줄곧 다이니치(大日)라는 일본 단어를 사용해 교리를 설명했다.

다이니치는 일본 신곤종의 비로자나불을 지칭하는 일본어였다. 일본어와 일본 불교에 능하지 못했던 하비에르는 1551년에 스오국(周防, 현재 산요도 야마구치현 동부)에서 선교할 즈음에야 야지로가 쓰는 다이니치가 적절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야지로가 한자 공부를 하지 못해서 일본의 종교 관련 자료들을 잘 읽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하비에르는 다이니치라는 잘못된 번역어를 라틴어 데우스(Deus)로 바꾸어 쓰기 시작했고, 다이니치는 악마의 창조물이라고 깎아내렸다. 라틴어 데우스로 음역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일본 사람들은 데우스를 데이 수오라고 발음했는데 "엄청난 거짓말"이라는 뜻의 일본어 다이 수오와 발음이 비슷해 어려움을 겪었다.

스오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분고국(豊後, 현재 규슈 오이타)의 다이묘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에게서 편지가 왔다. 분고국 항구에 포르투갈 배가 들어왔으며 몇 가지 중요한 사안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전갈이었다. 요시시게는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보였다.

하비에르는 히라도에 전갈을 보내 토레스 신부를 스오국으로 불렀다. 스오국에 600명으로 불어난 신자들을 그냥 두고 떠날 수 없었다. 토레스 신부는 1551년 9월 10일 스오국에 도착했다. 하비에르는 토레스 신부와 후안 페르난데스를 스오국에 남겨 사목을 잇게 했다. 히젠국에서도 그랬듯이 토레스 신부는 포르투갈 말로 설교를 하고 후안 페르난데스가 통역을 맡았다. 두 예수회원이 예수의 수난을 설교할 때면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하비에르는 혼자 분고국으로 향했다. 9월 말이었다.

1551년 9월 하비에르가 분고국에 있는 동안 스오국에서는 무장 스에 다카후사(陶 隆房)가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패색이 짙어지자 요시타카는 자결했다. 분고국의 다이묘 오토모 요시시게는 그의 동생 오토모 하치로를 보내 스오국을 다스리게 했다. 요시시게는 하비에르와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스오국의 동생도 토레스 신부와 후안 페르난데스에게 잘 대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일본 선교 마무리하고 인도행

하비에르가 인도를 떠나 일본에 온 지 2년이 지났다. 히젠국, 스오국, 분고국에는 이미 그리스도교가 자리를 잡았다. 하비에르는 일본 선교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떠나온 인도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일단 인도로 돌아가 예수회 일을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토레스 신부와 후안 페르난데스 수사에게 뒷일을 맡겼다.

하비에르는 1551년 11월 15일 베르나르도, 마태오, 주앙, 안토니오 등 일본인 예수회 지원자 네 명과 인도로 가는 포르투갈 배를 탔다. 하비에르는 베르나르도와 마태오를 인도로 데려간 다음 포르투갈을 거쳐 로마 예수회로 보내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시킬 예정이었다. 배가 분고국 항구를 출발했다. 오닌의 난 때문에 전쟁이 한창이었던 사쓰마국 근해를 피해 멀리 돌아 항해했다. 먼 바다로 나갔을 때 태풍을 만났다.

태풍이 지나갔을 때, 하비에르는 그가 탔던 배가 원래 항로에서 북쪽으로 수천 ㎞를 벗어나 중국 광동성 타이샨 앞바다에 와 있음을 알았다. 배는 샹추안(上川) 섬에 닻을 내렸다. 샹추안 섬은 중국 대륙 해안에서 불과 14㎞ 떨어져 있었기에 중국 밀수꾼들의 은신처이자 포르투갈 상인들의 해상 무역거점이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 섬을 성 요한의 이름을 따서 "쌍주앙(So Joo)"이라고 불렀다. 중국인들도 따라서 "샹추안"이라 불렀고 上川이라고 적었다.

하비에르는 샹추안 섬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코치에서부터 알고 가까이 지내던 거상 디오고 페레이라(Diogo Pereira)가 샹추안 섬에 와 있었다. 페레이라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향료제도에서 후추를 가져다 중국에 팔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페레이라는 인도 총독으로부터 중국과의 관계를 담당할 포르투갈 대사로 임명을 받았다. 페레이라는 하비에르에게 편지 한 통을 보여주었다. 광둥성의 성도 광저우 감옥에 갇힌 포르투갈인들이 쓴 편지였다. 수감자들을 대신해 포르투갈 대사가 중국 황제에게 전해달라는 탄원서였다. 중국에 가서 황제를 만날 명분이 하나 더 생겼다.



인도와 그 너머 나라들의 관구장 임명

항해 끝에 하비에르 일행은 1551년 12월 27일에 믈라카에 도착했다. 하비에르가 믈라카로 돌아와 보니 일본에 나가 있던 2년 남짓 동안 유럽에서 온 편지들이 쌓여 있었다. 그중에는 이냐시오가 1549년 10월 10일, 11일 연이틀에 걸쳐 보낸 편지가 두 통 있었다. 1549년 초 인도 코치에서 이냐시오 앞으로 보냈던 세 통의 편지들에 대한 답장이었다. 편지를 보낸 지 2년이 지나 답장을 받았다. 10일 자 편지는 그가 "인도와 그 너머의 나라들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었다. 11일 자는 회원 인사이동 등 예수회 행정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너머라고 한 것은 하비에르가 인도를 떠나기 전 이미 로마의 회원들과 이냐시오에게 편지로 일본 선교에 대한 계획을 알렸기 때문이다. 하비에르는 포르투갈령 너머 동쪽 끝 나라들의 예수회 장상이 되었다.